Page 13 - 동로인 19년 1-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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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시기에 개인이 종교 관련 인쇄물을 만드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로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되
           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성도들은 아주 극비리에 등사 작업을 진행하였다. 화남(華南)의 한 도시에 사

           는 성도는 2m 높이, 8㎡ 크기의 누각에서 열심 있는 성도들과 같이 성경 필사를 위해 등사 작업을 하였
           다. 그 결과 수백 권의 성경과 찬송가와 신앙서적 등이 만들어졌다. 이를테면 『황막감천(荒漠甘泉)』
           『안위지언(安慰之言)』 등으로 거기서 인쇄하고 제단 제본하고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은 성경
           을 성경 66권의 순서대로 인쇄한 것이 아니라 한 권씩 인쇄하는 대로 발송하였다. 인쇄분량도 갈수록
           많아지고, 보내야 하는 곳도 갈수록 먼 곳이 많아지고, 화남의 도시에서 외지로, 남방에서 북방까지로

           확장되어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안의 수색을 받았고, 신문용지가 통제를 받았는데 이것을 구매하고 관리
           하는 사람은 감시를 받았고, 인쇄소는 작업정지를 당하였다. 후에 다른 성도가 출판 사역을 담당하였

           다.


            성경과 신앙서적을 인쇄하는 일 외에 절강성 온주의 가정교회는 소책자를 편집하고 출판하여 성도들
           에게 공급하고 사용하도록 하였다. 소책자의 종류로는 성경공부와 설교와 교회 사역 방향에 관한 것들
           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합일문제(合一問題)』, 『진리를 위한 아름다운 싸움(爲眞道打美好的仗)』

           등이 있으며, 고난 중의 간증을 담은 책들도 있다. 국내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으
           나 신앙의 기초가 없는 초신자들에게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의 신앙적 기초를 세우는 데 귀한 서적이
           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부흥 중에 있는 가정교회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셈이었다. 특별히 동역자 문제,
           경제문제 등 각 방면에서 극도의 제한 가운데, 전도와 훈련과 출판 등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성도들은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고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의
           일과 교회사역을 감당하였다.


            3. 부흥 기간에 가정교회가 받은 박해



            가정교회가 부흥하는 시기에 내부적인 여러 종류의 제한들이 있었다, 동시에 외적으로는 정부의 압
           력과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당시 ‘반종교(反宗敎)’의 정치 분위기 속에서 성도들은 몰래몰래 예배를 드
           리고, 복음을 전해야 했다. 집회가 발각되면 집회참가자는 체포당하고, 심문을 당해야 하고, 만약 성경
           을 보는 것이 발각되면 역시 체포당하였다.
            당국은 우편물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심사를 하여서, 1978년 이전에는 해외의 복음방송기구가 받는

           우편물은 매년 10여 통에 불과하였다. 극동방송에 따르면 1972년에는 단 한 통의 서신도 대륙으로부터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1975년 원단(元旦)에 장춘교(張春橋)는 각 지방정부에 비밀명령을 하달하였는데, 3~5년 내에 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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